루카12,35-40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38.40)
설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보통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지는 마태오복음에서 8번 “행복하여라”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들이 누구라는 것을 일러줍니다. 그런데 오늘 또 한번의 “행복하려라”가 다시 등장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바오로 사도도 로마서 첫부분에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1,1)로 부릅니다. 그런데 종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기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의 존재하는 가치는 (행복은) 무슨 일을 하는가 즉 기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능에 가치가 부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의 존재는 “시간”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당연하다고 그냥 지나치는 시간을 놓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 종의 존재가 드러나는 시간은 바로 “밤중이나 새벽”은 잠이 드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이 바로 종의 가치입니다. 종은 누구나 “생각하지도 않는 때” (40) 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종은 시간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종은 ‘거슬러서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꺠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마르 13,37)
그 종은 바로 우리 신앙인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흐름에 순응하기 보다는 거슬러가 올라가는 법’을 주님께 배워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으로서 또 발걸음을 내딛는 설날입니다.
마르코 6,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4)
20년 2005년에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합니다. 피정이 끝나고 한번 보십시오. 상당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들이 보이는 연설이라고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장 기억하는 대목은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대목입니다. 의역을 하자면 지금 눈앞의 현실에 만족하기 보다는 더 추구하고 그 추구할 때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남들의 눈에는 바보처럼 보이는 창의력있는 태도를 요구했던 내용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대목보다 “to connect the dots”라는 말이 더 기억난다.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삶의 점들을 허투로 지나치지 말고 그 점들간의 인과관계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삶은 매순간 “점들”이 있고 그것이 우리의 미래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 점들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연결하지 못할 때 의미발생은 일어나지 않고 멈추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고향마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나의 점이 형성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질문을 던집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질식사합니다. 이미 정답이 반드시 옳은 답이 아님을 그들은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정답을 갖습니다. 그러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이상 질문에 대해서 머물지 못합니다. 그때 그 다음의 점은 설자리를 잃습니다.
피정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안심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영원히 알 수없는 신비의 존재일 뿐입니다. 신비를 신비로 인정하고 그 신비안에서 머물게 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점연결의 움직임안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정답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의 점연결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알아가는 피정이 되도록 기도합시다.마르코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7-9)
우리 삶의 형상을 일컫는 말 중에 ‘길을 떠난 나그네”라는 말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을 찾기가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길을 떠났다는 것은 알수 없는 어는 곳에 삶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근원을 찾아서 길을 떠난 희망을 간직한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길을 떠남은 궁극적으로 삶에 가치에 대해서 안주하지 않고서 계속 ‘왜’라고 질문을 하면서 그 영원의 가치에로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운명이자 초대라는 이야기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미션은 “영혼을 돌보는 특히 아픈 영혼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7)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주시는 것에 주목합시다. 세가지에 지팡이, 신발, 그리고 옷 한벌에 불과합니다. 그중에 제 마음에 가장 다가오는 것은 지팡이입니다. 왜 하필이면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하셨을까? 길거리에서 가끔씩 시력을 잃으신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는 길의 모양이나 가려고하는 방향을 읽어주는 도구입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분들에게 지팡이는 마치 레이다나 자신의 길을 만지는 촉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등산을 다니는 저에게 지팡이는 안전하게 내려오거나 걸어 올라가는 일을 하게 합니다. 기력이 약하신 분들이나 긴 여정의 순례를 떠난 순례자들의 손에 지니는 도구가 지팡이입니다. 한 사람을 똑바로 설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도구입니다. 무엇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그 지팡이 역할을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방향감각이 우리의 순례여정에 필요하다는 것, 자기가 가는 길을 언제나 신중하게 만지면서 대화를 하라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순례길에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것이라고 들려옵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올바로 방향을 잡고 살아가고 있나요? 빨리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계속 만져보고 재보고 들여다보면서 살아가고 있나요? 상황을 하느님의 말씀에 조율하면서 가고 있는가요? 우리는 내가 가는 길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함께 도와주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나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막연하게 있지말고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어떤 찰학자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순례를 마치고서 하느님이 마련해주시는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날까지 저에게 주신 지팡이를 잘 보살피면서 걸어가겠습니다.
마르코 6,14-29
그때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4-16)
가장 짧은 마르코 복음이 자세히 길에 이야기하는 스토리이다. 왜 그럴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한 관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오늘 복음은 이 문제에 대한 힌트를 준다. 어떤 사람에게는 과거의 경험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 어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삶에 간직한 희망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를 기다리는 사람들), 혹은 헤로데처럼 과거에 인질이 되기 때문에 형성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사람들도 예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현상으로만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뒤에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적을 옆에서 본다고, 자신의 희망에서 꿈으로 그려낸다고, 혹은 헤로데처럼 부정적인 과거가 삶을 옭아매고 있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그대로 살아간다고 예수의 본질을 만질 수 없게 된다.
살아가면서 목표 보이지 않을 때가 최악 아니다. 가짜 목표를 좇으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최악이다. 예를 들어 사울과 온 이스라엘군은 골리앗이라는 껍데기 보고 무서워 어쩔줄 몰라한다. (1 사무 17,11) 외형을 비교하면서 다윗과 상대 안된다고 외친다. 부분을 보고 전부로 착각한 것이다. 매순간 시험에 휘둘린다. ‘부분을 전부’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외친다: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1 사무 17,45)
현상뒤에 있는 예수의 본질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 가지 답을 헤로데의 삶에서 보게 된다. 헤로데도 부분을 전부로 착각한다. 체면이 전부라고 생각하니 극단의 실수를 범한다. 예수님만이 전부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부분은 설자리를 잃는다. 그는 변명하는 사람이다. 핑계의 왕자이다. 책임전가의 끝판왕이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핑계에 가볍게 대응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재앙이 바로 커다란 죄를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대사제 가야파는 어떤가? 빌라도는 어떤가?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수 있어도 잠자는 척 하는 사람은 결코 깨울 수 없다고 한다. 핑계는 언제나 ‘척병’에 걸린 것이다. 모른 척, 안 들은 척, 아닌 척… 헤롯은 우리의 스승이다. 핑계에 있어서는….
마르코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53-56)
아픈 사람을 위해서 여기 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픈 영혼들을 돕기위한 공동체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마을, 고을, 촌락을 다니십니다. 모든 사람은 어디출신이든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우리가 어떤 상태이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오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냥. 그대로. 그래도. 마냥. 그분은 그렇게 열리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저의 눈을 끄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픈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분주한움직임에 방향성이 잡힙니다. 바로 어디입니까? 장터로 아픈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장터에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방향성을 잡아준것은 예수님을 만나 낫고 싶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병든 사람들을 살리기위해서 우리는 가야할 곳은 병원입니다. 기도할 곳은 성당입니다. 공부를 해야 할 곳은 학교입니다, 등등. 그런데 오늘 병든 사람들을 고치기위해서 그들을 데리고 가는 곳은 유대교 회당도 아니고 병원도 아니고 ‘장터’입니다. ‘장터’란 물건의 교환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온갖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든 곳입니다. 그곳에는‘무엇을 사고자 하는, 팔고자하는, 교환하고자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숨쉬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제 ‘장터’는 물건을 교환하는 곳이 아니라하느님의 사랑과 병든 사람들을 낫게 해주고자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아름답게 교환되는 사랑의 교환소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을말하는가요? 어느 것이나 어느 장소나 그것의의미는 바로 그것을 만든 용도보다는 그곳을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 아닌가요? 나자렛은 이스라엘에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나자렛이됩니다.
오늘 사람들은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서 치유를 받았던 경험을 다시반복하고 있습니다. (마르 5,25-34) 비록 하혈하는 여인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때의 자신의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것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를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에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옷자락을 만지고싶어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그 의미를 모를 수있지만 한 사람, 단 한사람의 작은 행동이 이렇게 나비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나의 작은 행동이 결코 작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효과를 알지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작은사람입니다. 함께 할 때 우리는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물에 함께 걸린 사람들입니다.
마르코 7,24-30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7-28)
예수님은 그제 피곤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피곤하게 만든 이 그룹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이자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티로지역에서 알려지기를 원하시지 않으셨기에 어떤 집에 조용히 머물고 계셨지만 당신이 계신 곳을 알아내고는 자신의 딸에게서 마귀를 내보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아무리 작은 은총이라도,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은총이라도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그제와는 반대로 이교도이자 여성입니다.
정말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27)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너희 이방인은 강아지일뿐이다”라는 말이니 이 여인의 반응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이 여인은 ‘주님,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28)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주님의 은총 한 조각이라도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의 요청은 마귀가 딸에게서 떠나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이야기의 결론은 강아지로 비유되는 이방인 여인이야 말로 진짜 예수님을 알아본 믿음의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제시하고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같이 변두리의 사람들가운데서도 가장 변방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변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예수님을 만났던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의 후배같습니다. 이 여인은 아주 작은 성체에도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상기시키는 교리교사같습니다.
간절함 앞에서 서 있는 어머니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비유한 예수님의 모욕을 받아넘긴 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믿음은 치유의 기적을 만듭니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그 모욕을 이기게 만든 그 반응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기도를 많이 하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그리스도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피정을 마치면서 피정중에 부어주신 수많은 말씀의 조각들, 말씀의 은총의 부스러기를 수녀님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풀로 한조각 한조각 붙여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멈춤과 성찰과 들음과 바라봄의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주님은 하느님 말씀을 한 글자 한 글자 읽고, 써보고, 맛보는 받아들이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피정을 마친 여러분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나의 추천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것은 돌판이 아니라, 살로 된 여러분의 마음이라는 판에 새겨졌습니다.‘ (2코린 3,2)